2017년 개봉한 영화 〈싱글라이더〉는 한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감성 드라마입니다. 호주를 배경으로 조용하게 전개되지만, 그 안에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후회, 상실, 미련, 깨달음이 고요하게 파동을 일으킵니다. 영화의 후반, 한 줄기 반전은 지금까지의 모든 장면을 재구성하게 만들고, 관객은 그제서야 이 이야기가 왜 그렇게 ‘조용히’ 흐를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병헌은 이 영화에서 말보다 표정과 침묵으로 감정을 끌고 갑니다. 그가 연기한 강재훈(이병헌)은 실패한 중년, 무너진 가장, 그리고 죽음을 준비한 자의 얼굴을 동시에 가집니다. 〈싱글라이더〉는 화려한 사건이나 극적 전개보다, 하나의 인물이 삶을 어떻게 마주하는지를 그리는 ‘정서 중심의 영화’입니다.
삶의 끝자락,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
강재훈(이병헌)은 서울의 증권사에서 지점장으로 일하다, 투자 상품의 대규모 부실 사태로 인해 사실상 사회적으로 매장된 상태입니다. 모든 걸 잃고, 죽음을 결심한 그는 마지막으로 가족이 있는 호주로 향합니다.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멀리서 아내와 아들을 지켜보는 것으로 여정을 시작합니다.
아내 이수진(공효진)은 아들과 함께 호주 시드니 외곽에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음악 교습을 하며 조용히 지내는 그녀의 곁에는 친밀한 이웃 남성도 존재합니다. 재훈은 수진과 그 남자의 관계를 의심하면서도,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합니다. 단지 멀리서, 말없이 지켜볼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중인 지나(안소희)를 우연히 마주치게 됩니다. 직장을 잃고 갈 곳 없는 처지인 지나를 조용히 따라다니며 관찰하는데, 그녀 역시 외로움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이 둘의 만남은 직접적인 교류는 거의 없지만, 삶에 밀려나고 소외된 존재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 강재훈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가 아내의 집에 남긴 쪽지, 다시 태어나면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유서, 그리고 유령처럼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던 그의 존재는, 그가 사실상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 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감정 구조 – 후회와 관망, 그 사이에서
〈싱글라이더〉의 감정 구조는 매우 독특합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관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강재훈은 누구와도 깊은 대화를 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는 외부 세계에 개입하지 않고, 자신이 떠나온 삶을 조용히 지켜볼 뿐입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후회와 고독, 그리고 점점 깊어지는 회한입니다. 가족에게 충분히 다가가지 못했고, 일에 매달린 대가로 아내와 아들, 자신까지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수진이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그는 더욱더 고립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택한 방식은 ‘속죄’가 아닌 ‘수용’입니다. 강재훈은 어떤 갈등도 일으키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이별을 준비합니다. 마치 삶이라는 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자신이 직접 연출하듯, 그는 고요히 정리하고, 말없이 떠납니다.
인물의 상징 – 죽음, 소외, 그리고 존재의 자리
강재훈이라는 인물은 단지 죽음을 선택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현실에서 지워진 존재’입니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배제한 존재입니다. 수진과 아들의 삶에 자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감각은 그를 점점 비물질적인 상태로 밀어냅니다.
공효진이 연기한 수진은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합니다. 남편을 완전히 지워내진 않았지만, 그 없이도 삶을 꾸려가는 강인한 여성. 그녀는 새 남성과의 관계에서 어떤 기대나 사랑보다는 ‘현실’과 ‘안정’을 선택한 듯한 표정을 짓습니다. 안소희의 지나 역시, 이민자로서의 불안과 청춘의 흔들림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세 인물 모두는 공통적으로 ‘떠나온 사람’입니다. 제자리에서 밀려났고,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서로를 강하게 연결하지 않지만, 같은 파장 속에서 조용히 공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정서적 깊이입니다.
삶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바라본 풍경
〈싱글라이더〉는 인물의 외침 없이도, 아주 조용하게 가슴을 찌르는 영화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느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장 고요하고 아름다운 이별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강재훈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마주할 감정 – “지금 내 삶은 괜찮은가”, “무엇을 놓쳐왔는가”, “이대로 괜찮은가” – 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그러나 그것조차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싱글라이더〉는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떠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지켜본 풍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조용한 시선 끝에 남는 건, 말이 아니라 진심이며, 울지 않고도 충분히 슬픈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