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길복순〉은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중심으로 완성된, 감정과 액션이 교차하는 하이브리드 영화입니다. 킬러이자 엄마라는 이중 정체성을 가진 주인공 복순의 삶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 나아가 모든 ‘역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초상처럼 다가옵니다. 영화는 ‘청부살인’을 다루는 하드보일드 액션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모성’이라는 감정선을 교차시키며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인물 중심의 서사로 깊은 울림을 선사합니다.
〈길복순〉은 단지 킬러 여성 캐릭터를 내세운 액션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삶에서 여러 얼굴을 동시에 써야 하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얼굴로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얼굴들은 공존할 수 있는가?’
킬러와 엄마, 하나의 인물에 담긴 두 세계
길복순(전도연)은 전설적인 A등급 킬러입니다. 청부살인을 ‘업무’처럼 운영하는 기업 MK Ent.에서 가장 유명한 요원이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또 한 명의 복순입니다. 딸 김영지(김시아)와 단둘이 살며 도시락을 싸고, 학교 상담에 참석하고, 사춘기의 반항과 묘한 거리감 속에서 딸의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엄마’입니다.
영화는 이 두 삶이 하나의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습니다. 복순은 ‘계약 연장’을 앞둔 상황에서 한 가지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한 고위층의 소년을 제거하라는 의뢰를 받지만, 현장에서 그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약자임을 깨닫고 살해를 거부합니다. 이 순간, 조직과의 신뢰는 무너지고, MK Ent.는 복순을 ‘정리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이후 복순은 조직에서 탈주한 표적이 되고, 동료 킬러들이 하나둘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딸 영지는 엄마에 대한 실망, 친구들과의 갈등, 정체성 혼란 속에서 복순과 갈등하게 됩니다. 복순은 생존을 위해 싸우면서도, 한 사람의 엄마로서 딸과의 관계를 지켜내기 위한 내면의 전투를 함께 벌이게 됩니다.
전도연의 연기 – 액션보다 더 폭력적인 감정
전도연이 아니었다면, 〈길복순〉은 이만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영화 속 복순은 대사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대화보다 행동, 감정보다 침묵으로 모든 것을 말합니다. 딸 앞에서는 상처를 감추려 애쓰고, 조직의 동료들 앞에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말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 어깨의 기울기, 손끝의 긴장감은 매 장면마다 복잡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전도연은 액션도 액션이지만, ‘감정 연기’에서 압도적인 밀도를 보여줍니다. 엄마로서의 복순은 무력하고, 방어적이며, 지쳐 보입니다. 반면 킬러로서의 복순은 날렵하고, 주저함이 없으며, 끝까지 냉정합니다. 그러나 이 두 모습은 그녀 안에서 명확히 나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차하고 충돌하며, 관객에게 복순이라는 인물의 깊이를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게 만듭니다.
특히 후반부, 딸에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에서 전도연은 말없이 붕괴되는 감정을 얼굴로 그려냅니다. 죄책감, 두려움, 체념이 동시에 깃든 그녀의 표정은 단순한 ‘모성’을 넘어, 사랑의 방식을 잃어버린 한 인간의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액션이 아닌 감정의 리듬 – 두 얼굴의 공존을 그리다
〈길복순〉은 액션 장면 역시 인상적입니다. 특히 킬러들과의 대치 장면, 가정집을 배경으로 한 격투 장면 등은 속도감과 긴장감 면에서 하드보일드 액션 영화로서의 쾌감을 충분히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왜 싸우는가’입니다.
복순은 살기 위해 싸우지만, 동시에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그녀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존재를 보호하는 데 있어, 더 이상 정당한 수단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싸움은 처절합니다. 관객은 그녀의 주먹보다 그녀의 눈빛에 먼저 감정이 이입되며, 액션이 아닌 감정의 리듬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든 건, ‘킬러 기업’이라는 독창적인 세계관입니다. MK Ent.는 킬러들을 시스템화하여 등급을 매기고, 성과로 관리하며, 퇴사도 통제합니다. 차민규(설경구)는 냉정하고 카리스마 있는 대표이자, 복순과의 개인적 관계가 얽힌 인물입니다. 그의 여동생 차민희(이솜)는 복순을 경쟁자로 간주하고 끝까지 제거하려는 냉혹한 킬러입니다.
이 구조 속에서 복순은 단순한 ‘탈주자’가 아니라, ‘시스템 밖으로 나가려는 인간’으로 재정의됩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하는 건 복수도, 생존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더 이상 킬러도, 완벽한 엄마도 아닌, 결점과 상처를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합니다.
엄마이자 킬러, 결국 사람
〈길복순〉은 역할의 경계를 허무는 영화입니다. 전도연은 이 영화 속에서 액션과 감정, 차가움과 따뜻함, 엄마와 살인자, 두 극단을 유연하게 넘나들며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냅니다. 그 얼굴은 모순되지만, 거짓되지 않습니다.
그녀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딸도, 조직도, 명성도 아닙니다. 바로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식이 때론 폭력이었고, 때론 거짓말이었으며, 결국엔 진심이었다는 사실이, 이 영화를 관통하는 유일한 진실입니다.
전도연은 〈길복순〉을 통해 다시 한 번 증명합니다. 어떤 장르든, 어떤 캐릭터든, 그녀가 입는 순간 그것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를 깊이 아프게 만들고, 이상하게 위로합니다.